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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_권리모(1기) & 안젤라

by. 모카

 유난히 하늘이 우중충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TV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가 오후부터 비가 올 예정이니 우산을 챙기라 말하고 있었고 그 전엔 들어오겠지, 하는 생각에 우산을 챙기지 않고 나온 바깥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다가온 듯 어둡고 습했다. 올려다 본 하늘은 이른 오전 시간대에 맞지 않게 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칙칙한 회색빛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약속장소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 카페였고 돈을 허투루 쓰는 습관이 없어 항상 값싼 캔이나 인스턴트 커피만 마시던 안젤라는 처음 와 보는 3층짜리 카페였다. 두리번거리며 앉을 자리를 찾고 있던 안젤라의 앞에 나타난 검은 정장의 남성은 그에게 이름도, 뭣도 묻지 않고 그대로 그의 약속 상대 앞으로 안내했다.
 안젤라는 제 앞에 앉은 백발의 남성과 테이블 위에 놓인 흰색 명함을 번갈아 쳐다보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새카맣던 머리는 새하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몸에 걸친 보라색 호피무늬 코트는 부내가 풀풀 났다. 원래 이렇게 돈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던 순간, 안젤라의 앞에 앉아있던 남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석 연구원 자리가 비어 있어.”
 안젤라는 제 앞에 놓인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명함 한가운데 커다랗게 위치한 BM이란 검은색 로고 아래엔 ‘회장 권리모’ 라는 선명한 글자와 사인이 박혀 있었다. 제 눈을 의심하다가, 글자를 하나 하나 찬찬히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가, 다시 남성과 조심스레 눈을 마주쳤다.
 “들어온다면 연봉 5000은 지금 보장하지. 앞으로 더 올라갈 거고.”
 “할게요.”
 “좋아.”
 TV나 인터넷, 심지어 길에서도 자주 봐 왔던 대기업이다. 그 기업의 회장이 직접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내 오며 어마어마한 연봉을 약속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다는 안젤라의 생각이었다. 첫눈에 알아보기 힘들만큼 변한 회장의 모습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개인 취향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안젤라가 명함을 제 지갑에 넣자마자 곧장 계약서를 내놓는 리모 옆의 남자는 안젤라에게 펜을 건넸다. 경호원인지 비서인지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니 경호원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있던 수석 연구원이 자릴 비웠나요? 내가 그 대타고?”
 “아니, 원래 없었어. 내가 그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었지.”
 “이제 와서 들이는 이유는?”
 “회장직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벅차.”
 음, 그렇긴 하겠네요.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해 내려가며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나눠 보았지만 대학 시절과 별 달라진 게 없나, 싶다가도 알 수 없는 오싹함에 앞으로 자신에게 월급을 줄 ‘회장’이 아닌 대학 선배, 인간 ‘권리모’에 대해선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근데 왜 하필 나죠?”
 “무슨 의미지?”
 “아니, 그야 선, 회장님과 친했던 사람 중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도운 선배도 있잖아요? 실력은 몰라도 친하기로 따지자면 도운 선배가…….”
 아. 이거구나. 사인을 하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 덕에 리모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차가운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보았고 결국 안젤라는 리모의 변화에 대한 원인이 도운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싸운 게 아니라 이건 좀 더…….
 “다음주부터 나오면 돼.”
 사인을 마친 계약서를 빼앗든 들고 간 리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젤라는 같이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리모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리모는 안젤라로부터 빼앗은 계약서를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남성에게 건네고 인사도 않은 채 성큼성큼 안젤라의 시야를 벗어났다.
 “……펜 못 돌려줬는데.”
 멍하니 손에 쥔 펜을 바라보던 안젤라가 중얼거렸다. 창 밖에선 오후부터 온다던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내리고 있었다.
 
 [재회의 과정]
 w. (카페)모카
 
 대학 선배의 회사에 입사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근무 환경은 쾌적하고 동료 직원들은 무난한 사람들이었으며 출근 시간도, 퇴근 시간도 적당했다. 단점이 있다면 구내 식당의 음식 맛이 별로라 사내에 있는 식당을 두고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점이었지만, 안젤라는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젤라, 오늘 굳이 뭐 먹고 싶은 거 없음 요 앞에 순대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괜찮지?”
 “네, 좋아요.”
 노트에 빼곡히 적어 내려가던 공식들을 덮은 채 안젤라가 자리에서 일어서 입고 있던 연구 가운을 벗었다. 노란 염색머리의 동료 연구원은 안젤라와 함께 연구 진행 방향을 가볍게 논하며 연구실을 나서 복도의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아, 이번 시즌도 이렇게 가는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여유로워서 놀랐어요. 단기간에 성장한 기업이라 바쁘고 정신 없을 줄 알았는데.”
 아, 우리 원래 이래. 동료 연구원의 말에 안젤라가 흥미로운 듯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새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는 짐수레에 커다란 박스를 쌓아 운반 중이던 택배 회사 직원들이 타고 있었다..
 “회장님이 거의 다 하시거든. 아이디어, 설계, 실험, 디자인, 제조……. 물론 담당 팀이 있긴한데 회장님이 워낙, 괴물이잖아.”
 아마 이것도 회장님한테 갔다 오는 거일 걸, 이라고 말하며 동료 연구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젤라는 일주일 전에 잠깐 보았던 제 선배이자 상사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원래 알던 모습보다 훨씬 더 수척한 모습이다 생각했는데 이런 이유였구나, 싶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서며 문이 열렸다. 지하 주차장을 향하는 버튼을 누른 택배 회사 직원들을 뒤로 한 채, 안젤라와 그의 동료 연구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멈출 생각이 없는 건지, 동료 연구원은 계속해서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여튼 간에 이게 다 3년 전 그 일 때문이야. 그 뒤로 사람이 제대로 미쳐서는…. 뭐, 우리야 밥줄 튼튼해지고 좋지만.”
 “3년 전? 그때 뭐 있었어요?”
 “어, 너 몰라? 로봇 연구소 화재 사건. 회장님도 그 사건 피해자잖아.”
 안젤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로봇 연구소 화재 사건이라면 예전에 얼핏 들은 적이 있지만, 그때의 안젤라는 취업이니 뭐니 하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에 매스컴에서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정도, 딱 그 정도의 정보 밖에 알지 못했다. 로봇 연구소에서 화재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고 불길이 오랫동안 잡히지 않아 꽤 긴급했다던 현장. 그런데 그 피해자가 자신의 상사였을 줄이야, 안젤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동료 연구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동료 박사 부부랑 아이들도 죽고, 회장님 아내 분이랑 그 뱃속에 있던 아이도 죽고. 회장님도 1년 전까지 혼수 상태였으니 말 다 했지.”
 대학을 다닐 때도 그 성격 까칠한 권리모와 친했던 건 고등학교를 같이 나왔다던 천재, 차도운 밖에 없었다. 아마 그 죽었다는 동료 박사가 차도운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 안젤라는 괜히 오싹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죽었단 소식을 듣자 여러모로 착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저렇게 일에 미친 게 다행이지.”
 “네?”
 “잘못 미쳐서 범죄에 손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금 얄궂은 구석이 있긴 했어도 안젤라가 기억하는 선배는 나름의 준법 정신과 개념 정도는 충분히 갖춘 사람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안젤라는 어느덧 도착한 국밥집으로 제 선배의 등을 떠밀며 애써 웃었다.
 
 *
 
 그 뒤로 안젤라가 회장을 본 것은 한 번, 다른 부서에 실험 결과 자료를 전해주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복도 한쪽 면이 커다란 통유리로 되어있었기에 디귿자 모양의 건물은 한쪽 복도에서 반대편 복도의 모습이 훤히 다 보였다. 품 가득 서류 봉투를 안고 걸어가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보라색 코트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는 회장은 흰색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무릎까지 오는 갈색 가죽부츠는 어딘가에 마구 긁혀 생채기가 나 있는 것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는 평소보다 더 위로 치켜 올라간 채로 시뻘개진 얼굴이 씩씩거리며 숨을 토하는 회장이 지금 매우 화가 나 있음을 알려주었다.
 후에 누군가의 말이 귀에 들렸을 땐, 회장이 꽤 자주 개인 차고에 가 무언가를 퍽퍽 발로 차고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과, 아마 발작적으로 화를 내는 것 같다는 추측성 발언이 회사 전체에 퍼진 상태였다.
 
 *
 
 창 밖으로 쏟아지는 억수비가 창문을 매섭게 두드렸다. 지난 밤에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어 컴퓨터에 메모를 해 두기 위해 일찍 출근한 안젤라는 탕비실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오며 양 팔을 손으로 비벼 열을 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춥진 않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싸늘한 기온에 안젤라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싸 마시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번 기획에는 맞지 않는 아이디어지만 아마 다음 기획이 구체적으로 잡힐 때 즈음엔 쓸 만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 볼펜 돌려줘야 하는데.”
 모니터 옆 연필 꽂이에 꽂힌 검은색의 고급진 볼펜은 대형마트에서 대충 산 싸구려 플라스틱 볼펜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이 볼펜을 제가 맡게 된 지 어느덧 3주, 갓 입사했던 일주일 동안은 새로운 업무와 일상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2주 차에는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없는 회장의 출장과 잠수.
 동료 직원들을 회장이 더러운 돈에 손을 댄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안 좋은 일에 엮여 연락이 두절된 것을 출장이라 대충 둘러댄 것이다, 수근수근 말이 많았지만 안젤라는 거기에 대해 단 한마디의 말도 얹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입사하기 전에도 이런 분위기는 익숙하게 형성된 듯 했지만 결국 그렇게 수근대는 사람들과 안젤라 본인도 그 소문들의 정점에 서 있는 회장에게 협력하고, 그 돈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 어떤 말도 제 앞길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2주일 전 동료 연구원으로부터 들은 회장의 과거사에 대해 궁금한 점이 산더미였지만 더 알았다간 뭔가 좋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에 다른 쪽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려버린 덕에 안젤라는 그 뒷이야기를 여태껏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회사의 일이 한가하다 해도 다른 회사의 수석연구원자리에 비해 한가하단 이야기였지, 안젤라의 스케줄은 항상 빽빽했으므로 다른 곳에 신경을 쓸 틈이 없던 탓도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직후 다른 사무실로 옮겨갔으니까 물을 사람도 마땅치 않네…….”
 안젤라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결심한 듯 연필 꽂이에 꽂혀 있던 볼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껏 낙하산이라는 말이라도 나올까 눈치를 보며 회장과의 유별난 관계에 대해 감추려 애를 쓰고 있었는데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지금의 이른 시간이라면 회장실에 볼펜을 돌려주러 잠깐 들르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싶었다. 회장이 웬만한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회장실은 높고 커다란 건물의 맨 꼭대기층, 하얗고 넓은 방이었다. 건물을 소개 시켜준 직원에게서 회장실의 위치와 대략적인 분위기만 전해 들었을 뿐,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안젤라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한 가운데 서 있는 자신에게 이질감이 들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지만 복도 바닥의 재질이 매끈한 대리석이었기에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공허하게 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복도에 있는 문이라고는 엘리베이터에서 얼마 걷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갈색 문 밖에 없었다. 노크를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반응도 들리지 않았기에 안젤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뭐야.”
 생각보다 쉽게 열리는 문에 안젤라는 당황한 듯 짧게 중얼거렸다. 슬그머니 열리는 문의 틈을 더 넓게 벌리자 넓은 책상과 책장, 그리고 작은 소파가 보였다. 불이 켜지지 않은 데다 창문도 없어서, 빛이라고는 안젤라가 서 있는 복도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문틈을 통해 방 안으로 쏟아지는 게 다였다.
 ‘명패가……, 회장실은 저긴가보네.’
 이 작은 방의 색은 흰 색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책상 위에 놓인 명패에 적힌 직함과 이름은 회장도, 권리모도 아니었다. 이곳은 회장실 앞에 있는 비서실이란 결론을 내린 안젤라는 최소한의 빛만 들어올 문틈만을 확보한 후, 종종걸음으로 방 안쪽의 또다른 문 앞에 섰다. 복도에서 본 문과 별 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 문을 열었던 것만큼 문을 가볍게 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똑똑, 노크를 했지만 이 곳에 들어올 때와 같이 안 쪽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고, 문이 스르륵 열리지도 않았다. 어두운 비서실과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온 것이 슬슬 양심에 찔리기 시작한 건지 안젤라는 조금은 다급하게, 그리고 조금은 긴장하며 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 손잡이는, 아까와 같이 부드럽고 막힘 없이 움직였다.
 “회장실 보안이 이래도 되는 거야…….”
 결국 비서실에서 회장실 안까지 들어오는 데 성공한 안젤라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에게 새 일터를 소개해준 직원의 말처럼 회장실이 새하얗진 않았지만, 창가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하얀색 블라인드가 가로막고 있었기에 비가 쏟아지는 우중충한 날이라도 회장실 안은 오히려 온통 하얀 빛으로 밝았다. 넓은 책상 뒤에 떡하니 붙어 있는 부릉 모터스의 로고, 그 옆에 있는 책장, 그리고 회장실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소파와 그 가운데 있는 테이블. 비록 명패는 없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이곳이 권리모의 사무실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안젤라는 천천히 회장실 안을 둘러보며 리모의 부재를 확인했다. 평소만큼 일찍 나오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너무 일찍 온 것인지. 리모는 회장실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은 왜 열려있는 거야……. 나야 고맙지만.”
 볼펜은 핑계고, 사실은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변한 건지, 이 회사의 목적이 단순 편리하고 안전한 자동차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게 맞는 것인지 내심 의심스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인 없는 비서실을 통과해 회장실까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동료 연구원과 다른 직원들이 수군대는 말, 우연히 본 회장의 이상한 모습들, 단기간에 세계로 뻗어 나간 자동차 회사. 아무리 뜬 소문이라도, 말은 근거 없이 퍼지지 않는다.
 천천히 방 한 쪽의 책상에 다가가자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 놓인 기계의 도면이 보였다. 반은 자동차의 도면이었고, 반은 처음 보는 기계의 설계도였다.
 “버그…벅?”
 설계도의 첫장으로 보이는 종이를 집어 들고 제일 위에 커다랗게 쓰인 영어를 소리 내어 읽었다. 처음 보는 설계도와 이름. 이번 기획에 이런 것도 있던가, 하는 생각으로 재빨리 설계도를 눈으로 훑었다. 그러느라 안젤라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보란 듯이 대놓고 책상 위에 늘어놓은 설계도들과 열린 문, 비워진 사무실의 수상함을 한 발 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안젤라.”
 안젤라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며 들고 있던 설계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이유로, 갑자기 뒤쪽에서 들리는 차갑고 낮은 목소리도 한 몫을 했지만 그가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은 설계도의 내용, 즉,
 “……선배.”
 도시 테러에 사용할 기계의 목적과 존재였다.
 흰 빛이 도는 안젤라의 얼굴이 희게 질린 건지, 아니면 회장실의 창문과 블라인드를 통해 들어오는 빛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안젤라는 천천히 뒤를 돌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상사이자 대학 선배를 경악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거. 봤나?”
 턱 끝으로 제 책상을 가리키며 짧게 묻는 리모에 안젤라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이 회장실에 들어와 제 목적을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달성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이 층에 내렸을 때부터 리모의 손 안에서, 그의 계획대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봤겠지, 일부러 보라고 훤히 펼쳐 놓은 건데.”
 리모는 태연스레 중얼거리며 할 말을 잃은 안젤라를 지나쳐 바닥에 떨어진 설계도를 주워들었다. 안젤라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처 다 보지 못했다면 설명해주지, 나는 이 기계를 통해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의 웃음을 없애 버릴 거야. 그러기 위해선 자동차와 기계, 그리고 이 기계의 설계와 제조를 도와줄 사람과 이걸 자동차에 설치해 줄 사람이 필요해.”
 “……그걸 나보고 하라고요?”
 “물론 설치는 다른 사람을 시킬 거야. 돈만 주면 어떤 일이든 할 인간 하나 찾는 것 쯤이야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쉽겠지. 하지만 기계를 만드는 건 그럴 수 없어.”
 리모는 어느덧 평정심과 이성을 되찾고 재빨리 머리를 굴려 상황 판단 중인 안젤라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날 실망시키진 않겠지, 리모는 책상 아래의 첫번째 서랍을 열어 액자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모니터 옆에 세웠다. 단발머리를 한, 또렷한 인상의 여성이 액자 속에서 웃고 있었다.
 “월급은 지금의 배를 주지. 그리고 현재 하는 일은 연구원들을 더 붙일 거야. 다시 말해 네가 하는 프로그램에서의 부담감은 갖지 않아도 된단 소리다.”
 일순간 리모의 부드러워진 눈매와 어딘가 비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안젤라는 그의 손이 닿아 있는 책상 위 액자에 절로 눈이 갔다. 아마 저 사람이 3년 전 화재 사고로 죽은 리모의 아내일 거라 어림 짐작했다. 언젠가 대학 동기들에게서 전해 들은 소식으로 리모의 결혼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얼핏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세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죠?”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봐도 그의 행동과 계획에 대한 정당한 까닭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남에게 고분고분 지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에게 되묻긴 했지만, 그것도 속으로는 덜덜 떠는 중이라 말이 제대로 나왔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자동차와 기계를 이용해 도시를 파괴한단 소리는 인명피해가 필수적으로 생길 거란 소리였고, 그 말인 즉슨 리모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이 곧 살인 행각이란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가족은 이미 3년 전에 죽었고 남은 사람은 커다란 기업의 회장이 되어 가족에 대한 미련만을 가지고 편히 잘 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굳이 죄를 지으면서까지 저렇게 하는 이유를, 안젤라는 납득할 수 없었다.
 “복수. 그리고 얻는 건 내 가족과의 재회야.”
 ‘그래도 저렇게 일에 미친 게 다행이지.’
 ‘네?’
 ‘잘못 미쳐서 범죄에 손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안젤라는 뒤늦게 머릿속에 떠오른 동료 연구원의 말을 이해했다. 강산도 변하는데 사람이 변하는 것 정도야 놀라울 게 없었다. 더군다나 좋지 않은 사고로 비참하게 가족과 친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눈을 감고 반쯤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리모의 얼굴에선 슬픔과 외로움을 둘째 치더라도 피곤함과 지침, 고단함도 적지 않게 엿보였다.
 “나 혼자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회장직과 겸하려니 벅차고 힘들어.”
 “선배.”
 “난 네 손이 필요해. 그리고 네가 필요로 하는 건 돈이겠지.”
 안 그래? 어느새 다시 날카로운 눈매와 단호한 말투를 되찾은 ‘회장’ 리모가 안젤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당연히 안젤라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에 협조할 것이란 자신감. 안젤라는 리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을 꽤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자신에게 수석 연구원 자리를 제안했을 때부터 지금 이런 상황을 처음부터 노리고…….
 “……좋아요.”
 사실 아주 잠깐, 잠시 동안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대학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그때 그 연락을 받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악당이고, 거기에 별 말 없이 따르는 나도 악당이 되겠지만.
 “그렇게 하죠.”
 별 후회는 하지 않는다.

2019. 09. 20 ~ 2019. 11. 16 레트로봇 빌런&흑화 'BLACK'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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