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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화_권리모(8기) & 또봇 제로

by. 아드

“제로!”

 

정신이 아득해진다. 네가 하는 행동, 네가 하는 말, 네 동작 하나하나. 네가 내뱉는 모든 것이 뇌리에 사정없이 박혔다. 공허하다. 한없이 타오르는 불길, ……너무나도 공허하다. 그때처럼, ……그래 너는 항상 그랬어. 뭐든지 자기 맘대로. 너는 언제나 이기적이었잖아. 나 같은 놈보다도 훨씬 더 이기적 이었어 제로. 난 네가 싫어. 싫어 죽겠어. 마지막까지 너는 네 생각뿐이지. ……대체 어떻게 너를 설명해야 하지? 실패작, 파괴자……

 

 

……

……………제로?

 

 

“제 1목표, 주인의… 안전.”

 

 

…역시 기분 나빠

 

너로 인해서 내 세상이 무너져 내렸는데

그러지 말았어야지, 너만큼은, 너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어차피 이런 운명 이었더라면 또 다시 나를 남겨두지 말았어야지. ……

 

 

 

 

 

 

“………………님.”

“름…………모……사님.”

“……부름, 리모 박사님.”

 

“……! 아, 어. 제로.”

 

권리모, 갑작스레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 놀라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난다. 차 시트에 앉아 깜빡 졸았던 것 같다. 피곤… 한 건가? 그럴 만도 하지. 그래, 그러니까 오늘도……

 

 

 

“…질문, 또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응.”

 

 

 

“걱정, 리모 박사님. 자동운전모드로 바꾸시는 게……”

“맞아요, 아빠. 어제 늦게 주무셨잖아요.”

“아니야, ……어제 유난히 늦게 자서 그렇지 뭐. 걱정 하지 마 세모야. 그리고 제로.”

“……”

“응답, 알겠습니다.”

 

리모 박사님. 어째서 악몽을 꾼 걸까. 그럼 어떤 꿈을? ……궁금하지만 질문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제로는 이따금 생각했다. 가끔씩 꾸는 악몽이란 대체 무엇을 말 하는 건지.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그에 대해서는 도통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지 않으니 알 턱이 없다. 아니, 나만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굳이 나에게 말 하지 않을 이유는…… ……여기까지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 역시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겠지.

 

“으음…… 이쪽인가? 어두워서 안 보인다. 하하, 나도 이제 늙은 건가…….”

“아빠 정도면 늙었죠. 그리고 지금 밤이라서 잘 안 보이는 거 아녜요? 그냥 자동운전모드로 바꿔요. 위험하잖아요.”

“아니, 아니! 괜찮다니까? 아빠를 뭐로 보니, 세모야! 이 아빠는……”

 

 

 

“부름! 리모 박사님!”

 

 

 

쿵.

 

 

 

순식간 이었다.

 

 

 

 

그 순간, 제게로 달려오는 사정없이 달려오던 차를 피할 틈도 없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충돌하였다. 제로가 제 스스로 피하거나, 차의 속도를 낮추기도 전에. 다행히 엄청나게 커다란 충돌은 아니었다. 내가 차마 옆에 앉아있던 너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괜찮은지 확인조차 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옅게나마 들은 채로. 한없이 익숙했던 그 목소리가 왜인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을 안겼다. 그렇지만 그 날은 자신의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참담하고 비참한 순간을 손에 꼽으라면 아마 그 때가, ……세 번째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박사님!”

“리모…!”

 

권리모가 눈을 뜬 것은 기적적이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풍경은 짜증나게도 익숙한 흰 천장. 갑작스럽게 제 눈에 들어오는 불빛에 표정을 찡그렸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제 자리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갑작스러운 불안감, 불안정함, 혼란스러움, 두려움이 나를 집어 삼켰다. 무슨 감정인지 모를, 그런 감정. 혼란하기만 하다. 어째서? 왜? 무슨 일 때문에? 내가, 내가 왜? 영문도 모른 채 식은땀만 계속해서 흘렸다.

 

“세모, ……세모는?”

 

아이들의 침울한 표정.

어딘가 슬퍼 보이는 것 같은 표정.

머뭇거리는 듯한 행동.

 

 

아,

아,

아,……

……………………………………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죽음이라는 소재는 이제 신물이 난다. 당연하고 지루하고 터무니없이 흥미롭고 무의미한 것들. 그렇지만, 잃는 게 무엇보다 쉬운 삶이었던 나에게는. 적어도 익숙해져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력함에 깊은 죄악감이 마구 휘몰아쳤다. 침체된 자신의 몸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한심하다. 그 때에, 내 세상은 종말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권리모가 몸을 전부 회복할 때까지의 시간은 꽤나 많이 흘렀다. ……몇 개월째더라. 몸을 말끔히 회복하고 드디어 지긋했던 병원 침실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이다. 병실에 있으면서 많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모의 대한 일도, 일은 어떻게 잘 처리되었다는 말도, 가끔 오는 안부 전화도. 투명한 창밖을 흘긋 내려다보면 추적추적 내리는 투명하지만 선명하게 빗줄기가 보인다. 소나기인가? 찝찝하고 건조한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우산을 펴들어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모습. 너는……

 

“……”

“제로?”

 

오랜만이네. 제로의 모습을 보자 온갖 감정이 마음속에서 마구 사무치기 시작했다. 반가움, 기쁨? 아니면, 슬픔, 분노, 배신감? 그것도 아니라면. 이 감정은 대체로 무슨 감정일까. 자기 멋대로 정의할 수 없던, 무언가의 감정 이었을까.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아무상관 없을 것만 같았다. 너라도 곁에 있다는 생각에, 너라도. 아니, 너라서. 너였기에 내 곁에 있다는 생각에. 그래, 이건…… 무의식적으로 안심했던 너를 향한 내 기분일 테니까. 라고, 권리모는 생각했다.

 

“질문, 리모 박사님. 몸은 좀……”

“잠깐만,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봐. 사과라던가 안부 같은 것들도. 잠깐만.”

 

제로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권리모는 제로의 앞에 성큼 다가서며 입을 열고, 우산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차의 앞부분을 천천히 쓸어내리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

 

“나, 어떡하지?”

 

아, 왜일까. 이제 그에 대해서는 나쁜 생각들은 버리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잊을 수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음에도. 세모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해도. 그래도, 그래도 분명 그랬을 텐데…… 오랜만에 네 모습을 보자니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기 때문일까. 적어도 이건 네 탓이라고 말 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변명거리라도 만들어버리는 나니까. 그만큼 이기적이니까……

 

“질문, 무엇을 말입니까?”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로, ……이럴 땐 무슨 행동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제는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어. 세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던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위할 사람도, 무엇도 없어져버렸는데…… ……더 이상 살아가도 되는 걸까?

죽고 싶어, 나.”

“……!”

 

네가 당연히 부정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당황할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내 말에 복종하고,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게 제로 너였으니까. 그게 너니까.

 

“아냐, 아냐. 식상한 대답은 됐어, 그러니까…… 리모 박사님의 탓이 아니라던가, 죄송하다던가, 살아가 주라던가…… 뭐 그런 거. 이것만 대답해 줘. 이럴 땐…… 어떡해야 할까?”

 

제로는 오랫동안 고심하는 듯 보였고, 끝내 말을 이었다.

 

“……제의, 리모 박사님께서는…… 전처럼,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뭐? 무슨, 그게…… 무슨 뜻인데?”

“응답, 이것이, 리모 박사님을 다시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니. 제대로 설명 하지도 않고. 전처럼 이라는 게, 대체………………어?

 

“…………뭐?”

“……요청, 부탁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리모 박사님은……”

 

권리모는 우산을 잡고 있던 한쪽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바람이 어깨를 적신다. 그 사이에서, 나는 무슨 대답을 했어야 했을까.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그때 정확히 무슨 대답을, 무슨 반응을 했는지. 이제 그 에게는 아득한 옛 이야기이다. 그렇다.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괜찮지 않지만, 그리고 한동안은 괜찮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권리모는 제로의 말에 순응했다. 무슨 감정을 담아, 어떤 톤으로. 어떤 표정으로 그 말에 순응했는지는. 그 당시의 나와 너만 기억하고 있을 일이다.

 

 

 

 

“……네가 떠나면 나한텐 아무 것도 안 남는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너잖아. 함께 하자, 제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모두를 사랑하기로 했다. 네가 그랬듯이. 비로소 추락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네 삶은 내 삶과 나란하니, 네가 죽으면 나 역시 없다. 네가 없으면 나는,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이번만큼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며.

2019. 09. 20 ~ 2019. 11. 16 레트로봇 빌런&흑화 'BLACK'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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