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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50년

※시즌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쟁터에도 아침은 온다. 1963년 자원입대하여 처음으로 이역만리의 정글 땅을 밟아 봤던 데이브에게는 그 사실이 살벌할 정도로 신기하게 다가왔다. 비명과 포성, 또는 숨막히는 긴장으로 가득찬 밤을 견디는 동안은 마치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해는 항상 뜬다는 게, 잠깐이나마 평화를 가장한 고요를 맛볼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아침이 온다는 사실만으로 꾸준히 감동하기에 5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기에 1968년의 데이브는 한때 더 이상 아무리 아름다운 아침이라도 자신의 무뎌진 감각을 깨울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데이브는 그 믿음을 깬 사람이 자신의 품에서 자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막사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짧은 갈색 곱슬머리와 피부를 빛내고 있었고, 지금 감겨 있는 두 눈이 떠지는 순간 안 그래도 예쁜 녹색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더 오묘하게 반짝일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데이브의 아침은 충만해졌다.

‘클라우스.’ 슬슬 소란스러워지는 바깥 소리에 데이브가 클라우스를 불러 깨웠다. 귀여운 잠투정을 하며 기지개를 켠 클라우스가 눈을 떴다. 데이브의 상상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눈이 데이브를 곧게 쳐다보다가 곱게 접혔고, 클라우스는 데이브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클라우스에게 듣는 그 흔한 인사가 데이브의 아침을 마법처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시 후 데이브와 클라우스를 포함한 장병들은 각자 삽이나 포대, 들것 따위를 손에 쥔 채 질척한 벌판을 걸었다. 지난밤 오랜만의 새벽 공습이 있었고 장병들은 베트콩의 시체 사이에서 전우의 시신을 골라 수습하는 일에 익숙했다. 죽은 사람 천지라고 누군가 신음하듯 내뱉은 말에 클라우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힘들어 하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다만 모두가 바닥의 시체를 둘러보고 있는데 클라우스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한다는 게 특이한 점이었다.

베트남 정글의 뜨겁고 습한 열기를 비웃듯 창백하게 질린 클라우스는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흘리더니 결국은 삽을 내던지고 뒤돌아섰다. 맨정신엔 못하겠다고 중얼거리고 휘청거리며 사라지는 클라우스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클라우스가 저런 식으로 사라졌다가 술을 마시거나 대마를 피우고 해롱거리며 돌아와서는 어떻게든 자기 몫의 일을 해내는 걸 모두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클라우스가 유난히 비위가 약해서 그렇다고 딱하게 여겼지만 데이브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클라우스는 비위 때문이 아니라 너무 여리고 정이 많기 때문에 어제까지 함께 고생하고 웃고 떠들던 동료의 시체를 덤덤히 처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클라우스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데이브 자신도 알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무의식 수준의 인지였다.

데이브와 클라우스가 처음 만난 그날에도 새벽 공습이 있었다. 별안간의 굉음에 깨어나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클라우스는 데이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말 한마디 못 나누고 전장으로 뛰쳐나갔으나 데이브는 포성과 섬광 속에서도 틈틈이 클라우스의 생사를 확인했고, 한숨 돌린 버스에서는 찾아가 말을 걸었으며, 버스에서 내린 뒤 두리번거리는 뒤통수를 흘긋흘긋 훔쳐보았다. 데이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클라우스를 신경쓰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다른 곳에 집중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클라우스가 무리 지어 움직이는 장병들을 눈치껏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걷는 게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데이브는 이미 클라우스를 향해 뛰고 있었다.

새벽에 피격이라도 당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그런 걱정을 하며 달려간 데이브였으나 클라우스에게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 불편한 걸음걸이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허리춤을 잡고 어기적거리고 있었다. 지난 새벽 급하게 건넨 데이브의 바지가 클라우스에게는 헐렁했던 것이었다.

밤새 바지를 움켜쥐고 포탄을 피해 다녔을 클라우스를 상상하자 데이브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분이 되었다. 괜한 멋쩍음에 멈춰 섰던 데이브는 그래도 클라우스가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되뇌며 용기를 내 그를 불러 세웠다. 데이브를 돌아본 클라우스도 데이브가 지난밤의, 그리고 방금 버스에서의 그 사람임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데이브가 군복 주머니에서 옷핀을 꺼내 건네자 클라우스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데이브가 클라우스의 허리 쪽으로 눈짓을 했을 때에야 그의 의도를 이해한 클라우스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옷핀으로 허리를 고정했다. 처음부터 잘 맞는 바지를 챙겨 주지 못한 걸 사과하는 데이브에 클라우스는 놀랐고, 데이브가 아니었다면 발가벗고 뛰어다녀야 했을 거라고 유쾌하고도 가볍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클라우스에 데이브는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클라우스의 어리바리한 꼴이 원치 않게 징병되어 제대로 안내도 받지 못하고 투입된 최근의 병사들과 똑같은 모습이라 데이브는 자신이 그에게 몇 가지 설명을 해 줘야 할까 고민했다. 일단 제대로 된 군복을 입히고 계속 들고 다니는 가방을 보관할 수 있도록 보급품 창고 쪽으로 안내하려고 결심한 순간 문득 데이브는 클라우스의 머리에 굳어 있는 피딱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미 새벽부터 얼굴에 피를 묻히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다친 거냐는 데이브의 물음에 횡설수설하던 클라우스는 곧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피범벅인 것을 들켰다.

놀란 데이브가 클라우스를 당장 의무소로 데려가 씻기고 치료하는 동안 클라우스는 의료용이라는 명목의 술과 약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그것들을 급히 집어삼켰다. 데이브는 클라우스가 혹시 히피인가 추측했다. 머리가 짧긴 하지만... 요즘 히피들이 밖에서 반전 운동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게 떠올라 데이브는 슬쩍 클라우스에게 무엇을 하다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다. 머나먼 곳을 그리듯 멍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에 잠긴 클라우스는 고문을 받다 왔다고 질문의 의도와 어긋난 답변을 했다. 10시간이 넘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이젠 괜찮다고 손에 들린 마리화나를 까딱하며 나른하게 웃는 클라우스의 얼굴에 데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고문이라면 적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했다는 뜻이겠군. 데이브는 고생 많았을 클라우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클라우스는 다소 뜬금없게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묻더니 이어서 몇 월 며칠, 몇 년도쯤이냐는 엉뚱한 질문까지 했다. 약기운 때문이려니 하며 데이브가 성실하게 대답하자 클라우스는 ‘세상에, 벤, 네 말이 맞았네.’ 하고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벤이 아니라 데이브라고 약간 머쓱하게 정정해 주자 클라우스도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그러나 데이브는 그날 이후로도 클라우스가 이따금 벤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벤, 이 전쟁이 언제 끝난댔지? 나 역사엔 젬병이었던 거 알잖아. 벤, 너는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바로 그 벤이구나.​ 데이브의 시신을 안고 울고 있는 클라우스를 한참 쳐다보던 데이브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을 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침착한 얼굴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그는 데이브와 눈이 마주치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가 애도한다는 듯 시선을 떨궜다. 데이브는 전장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제야 클라우스의 말을 이해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데이브와 같은 처지의 망자들이 사방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데이브는 클라우스의 곁을 맴돌았다. 저편에서 데이브를 부르고 있는 빛 너머로 가야 할 것 같았지만 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데이브도 여기 있어도 될 거라는 근거 없는 고집이었다. 지금은 클라우스가 데이브를 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기다리면 벤을 부르듯 데이브도 불러 줄 거라고 믿으며 클라우스를 따라가 보았다.

데이브를 회생시킬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진짜 죽음을 받아들이자마자 클라우스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전히 휘청거리지만 데이브가 본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빠른 걸음이었다. 클라우스는 데이브의 피가 잔뜩 묻은 두 손으로 자신의 가방을 찾아 꺼냈다. 10달 전에는 클라우스가 늘 끼고 다녔으나 어느 순간부터 놓고 다닌 그 검은 서류 가방이었다. 이 상황에 클라우스가 왜 갑자기 그 가방을 찾은 건지 데이브가 생각할 새도 없이 클라우스는 번쩍이는 푸른 빛과 함께 사라졌다.

데이브는 놀랐지만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잠결에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기억이 진짜였구나 납득했다. 클라우스는 허공에서 빛과 함께 나타났고, 나타났던 때와 똑같이 떠난 것이었다. 데이브는 벤 또한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그럼 이제 데이브도 빛으로 갈 차례였다. 어쩌면 클라우스도 그곳으로 간 걸지도 몰랐다. 빛을 넘어가면 클라우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아니면 어떡하지. 역시나 근거 없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빛 너머는 평안하고도 불길했다. 전장의 망자들은 하나둘 떠나기도 했고 남아서 떠돌기도 했다. 데이브는 고민 끝에 아까의 이해를 떠올렸다. 클라우스가 아직 여기에 있다면 언젠간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빛 너머로 간 것이라면 내가 나중에 가더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명제에 따른 결론은 확실했다. 나는 여기에 남는다. 데이브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재회를 기대하며 일단 기다려 보기로 다짐했다.

한동안은 베트남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협정이 체결되고 통일이 이루어지는 꽤 긴 시간 동안에도 데이브는 클라우스를 발견할 수 없었다. 데이브는 그제야 고향으로 가 보았다. 십수 년 만에 돌아온 위스콘신은 여전히 시골 같았고, 역시 클라우스는 없었다. 클라우스의 고향은 어디라고 했었지? 미국인이 맞기는 했던가? 데이브는 되는 대로 미국을, 전 세계를 떠돌며 클라우스를 찾아 헤맸다. 유령이라 다행이었다. 유령이기에 전 세계를 누빌 수 있었고, 유령이기에 사후 50년의 세월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2019년이라. 데이브는 80살이 되었을 클라우스를 상상했다. 데이브가 50년 동안 클라우스를 찾지 못할 만큼 무능하다는 쪽과, 찾고서도 나이가 든 클라우스의 모습을 못 알아봤다는 쪽 중 어느 게 더 암울한지도 가늠했다. 클라우스라면 분명히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예쁠 텐데. 데이브는 실없는 생각으로 암울한 기분을 다시 행복하게 바꾸었다. 20년만 더 찾아보고 빛으로 가자. 혹시 그때가 돼서 클라우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나무라면 또 100년 정도 사죄해야지.

데이브는 갑자기 등허리에 소름이 쭉 끼쳐 오는 것을 느꼈다. 죽은 이후로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데이브를 부르고 있었다. 빛? 빛보다 훨씬 강력한 부름이었다. 데이브는 영문도 모른 채 미국, 뉴욕 쪽을 향해 갔다. 이렇게 강렬하게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커다란 저택에 도착해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데이브의 눈앞에 벤이 나타났다. 그들을 결코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었음에도 데이브는 반가움을 느꼈고, 벤은 대저택의 수많은 방들 중 한 곳을 가리켜 줬다. 설마, 설마. 정말로, 드디어... 데이브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클라우스.”

마침내 그가 거기에 있었다. 세상에, 하나도 안 늙었구나.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나를 불러 줬구나. 데이브는 의자에 묶인 채 쓰러져 있는 클라우스의 이름을 불렀다. 혼미해 보이던 클라우스가 눈을 떴다.

“세상에.”

클라우스의 초점이 데이브에게로 맞춰졌다. 데이브도 클라우스도 50년 전처럼 활짝 웃었다.

“내가 해냈어. 성공했어.”

클라우스는 약간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클라우스는 이내 “데이브!” 하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데이브는 50년 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끼며 클라우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급할 건 없었다. 앞으로 영원히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데이브는 클라우스의 뺨을 감싸-.

- 2020. 8. 21 ~ 2020. 9. 25 엄브렐러 아카데미 합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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