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LLO, GOOD BYE
작품을 보지 않은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계정(@i_mthedaddyhere)에 올린 문신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아주 약한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라우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깊게 파인 상의 안으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클라우스는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열다섯까지 셌을까,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얇은 눈꺼풀 위로 뜨거운 조명이 느껴졌다. 클라우스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클라우스의 뇌를 가득 채운 질문이었다.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바람과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뜨거운 빛이 정신없이 클라우스를 괴롭혔다. 너무 밝은 빛은 오히려 클라우스의 시야를 빼앗았다. 그때, 클라우스의 귓가에 부드러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무언가가 말려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클라우스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막이 올랐음을 눈치챘다. 클라우스는 거대한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그것도 아주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단독 주연. 사람들은 클라우스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클라우스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환호에 부응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클라우스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온몸을 꽁꽁 묶어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의 환호는 점차 욕으로 변해갔다. 클라우스는 어떻게든 입을 열고 싶었다. 남을 매혹하는 그 입을 열어 모든 걸 반박하고 싶었다. 순간 클라우스의 뒤통수에 축축한 호흡이 느껴졌다.
“넘버 4. 아직도 그 꼴이군.”
익숙한 목소리와 동시에 클라우스는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 얼어붙은 건 클라우스 본인이었다. 그 어떤 외부의 압력도 없었지만, 클라우스는 숨 한 번 들이마실 수 없었다. 클라우스를 향한 관객의 야유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서서히 변해갔다.
넘버 4, 약해지지 마라. 넘버 4, 그게 최선인가. 넘버 4, 넘버 4!
클라우스는 숨이 쉬고 싶었다. 아버지를 향한 비난과 비판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숨이 쉬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호흡이 멈추길 바랐다. 그만 끝내도 되지 않을까. 매일 마주하는 그 존재들과 같은 길을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러니까.
“클라우스!”
벤은 겨우 꿈에서 벗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는 클라우스를 향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벌써 이번 주 들어 네 번째인 거 알지?”
클라우스는 대답 대신 창가로 손을 뻗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폐를 가득 채웠던 희뿌연 연기가 텅 빈 방을 가득 채웠다. 벤은 그런 클라우스를 눈으로 좇았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계속 그 꿈만 꿀 거야?”
“방법. 좋지. 지금처럼 계속 네가 깨워주면 어때.”
“됐다. 말을 말자.”
클라우스는 인상을 쓰는 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벤은 클라우스의 대답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진심이었다. 클라우스를 괴롭히는 지독한 꿈을 비집고 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클라우스는 그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공포로 가득 찬 꿈을 꿀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건 벤이 곁을 지킬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스는 대충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곤 다시 눈을 감았다. 벤은 그런 클라우스의 손바닥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클라우스는 자신의 손바닥에 문신을 세기기로 마음먹었다. 술과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던 뇌에서 번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귀신을 보는 사람이니 위자보드처럼 HELLO와 GOOD BYE 크게 박아놓으면 멋질 것 같았다. 클라우스는 탁자 앞에 놓인 바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약에 취한 뇌를 붙잡고 자신의 몸에 지시를 내렸다. 왼손을 뻗어서 조심스럽게 바늘을 잡아 들어 올리면 된다고. 그러나 정신을 차린 클라우스를 맞이한 건 자신의 검지에 박혀 고개를 까딱이는 거대한 바늘이었다. 어차피 바늘을 집어 드는 게 목표였으니까. 클라우스는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 들어오는 거라곤 달빛밖에 없잖아. 맨정신인 사람도 이 정도 실수는 할걸?
“또 무슨 멍청한 짓을 하려고?”
탁. 벤은 큰소리가 나도록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클라우스는 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벤. 그따위로 말하면 아무도 너랑 안 놀아줄걸. 응?”
클라우스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오른손을 둥그렇게 말아 왼손 검지를 넣다 빼기를 반복했다. 중요한 건 클라우스의 왼쪽 검지에 커다란 바늘이 박혔다는 점이었다. 안타깝게도 손가락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내 손가락도 너랑은 하기 싫은가 봐.”
“네 손에 박힌 바늘이 불쌍하다.”
클라우스는 가만히 서 있던 벤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아니 넷? 다섯?
“와. 베니 보이. 이제 분신술도 마스터 한 거야?”
벤은 몸까지 들썩이며 숫자를 세는 클라우스를 향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열세 번째 벤을 센 클라우스는 이내 혼란스러운 머리를 붙잡고 생각했다.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맞다. 클라우스는 손가락에 박힌 바늘을 뽑았다. 붉게 뚫린 구멍에서 퐁퐁 핏방울이 떨어졌다. 벤은 바닥을 적시는 핏방울을 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익숙하다는 듯 두어 번 손을 털어 피를 걷어내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잉크를 주워들었다. 잉크가 굳은 건지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잡고 씨름하던 클라우스는 결국 뚜껑을 치아로 물어버렸다.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아 자국이 가득해지고 나서야 검은 잉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진 잉크가 입으로 들어온 것 같지만, 클라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하다못해 잉크도 마셔?”
클라우스는 자꾸만 조잘거리는 벤이 거슬리는 듯 대충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뽑아낸 바늘에 잉크를 묻혔다. 망설임 없이 검은 바늘을 꽂고 빼기를 반복했다. 붉은 피와 검은 잉크가 섞인 검붉은 액체가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클라우스는 찔러야 할 곳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대충 카펫에 손바닥을 비벼 닦았다.
“방금 그 선택으로 수만 마리의 세균이 네 몸 안에 들어갔을걸.”
클라우스는 대충 어깨를 들썩여 대답을 대신했다. 알 게 뭐람.
그게 클라우스의 첫 번째 문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손바닥에 한 첫 번째 문신이었다. 당연히 결과는 최악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주한 클라우스의 손바닥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HELLO를 HELL로 적은 건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클라우스는 손으로 술잔을 들고 마시는 것도 힘들어서 벤에게 술을 먹여달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근데 술을 안 마셔도 죽을 거 같아. 나 술 좀 먹여줄래?’ 물론 벤 손에 진짜로 죽을 뻔했다.
클라우스는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매번 손바닥의 문신을 고쳤다. 다행인 건 클라우스의 실력이 조금씩 늘었다는 것이다. 손바닥에 문신하기를 반복한 지 여섯 번째, 클라우스는 드디어 그럴싸한 문신을 완성했다.
***
파이브의 실수로 1960년에 떨어진 지 3년이 훌쩍 지났다. 1960년에 떨어진 후, 클라우스는 자신의 말을 믿고 따라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다 못해 중독된 사람 같았다. 벤은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클라우스를 방해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친놈 취급만 받던 약쟁이가 1960년에 떨어지면서 타인들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들은 클라우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벤 역시 클라우스가 그런 절대적인 믿음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벤에게도 작은 이득을 주었다. 클라우스는 마약과 술을 끊었고 그만큼 벤의 행동이 자유로워졌다. 벤은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게 옳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클라우스가 남의 고통을 바라는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절대적인 믿음은 공허했다. 모두의 기대를 받는다는 건 부담스럽다 못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클라우스는 벤을 함부로 했다. 일부러 본인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했다. 벤은 클라우스의 의견에 돌을 던지면서도 절대 클라우스를 떠날 수 없었다. 그 점이 클라우스에게 만족과 안심을 심어주었다.
1963년 11월 14일. 벤과 클라우스는 싸웠다. 싸운 이유는 단순했다. 마음대로 행동하는 클라우스에게 화가 난 벤은 한 시간 내내 잔소리를 했고 클라우스는 그 잔소리에 질려 화를 냈다. 벤은 잔뜩 언성을 높이며 클라우스를 향해 삿대질했다. 클라우스의 목에는 핏줄이 잔뜩 솟았다. 둘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위해 쉬지 않고 거친 문장을 내뱉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평소처럼 귀엽게 투닥거리며 싸움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벤,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해! 넌 그냥 귀신이라고!”
아차. 클라우스는 급하게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클라우스는 어쩔 줄 모르며 벤의 눈치를 봤다. 가만히 서 있던 벤은 말없이 벽을 통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클라우스는 차마 벤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대로 한참 모습을 보이지 않던 벤이 다시 나타난 건 해가 진 후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클라우스는 벤을 발견하자마자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은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클라우스 앞에 섰다.
“벤. 그, 있잖아…….”
벤은 대꾸도 없이 클라우스를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놔.”
“어?”
그러더니 클라우스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라이터를 뺏어갔다. 지은 죄가 있는 터라 클라우스는 차마 뭐 하느냐 묻지도 못했다. 그저 곁눈질로 벤이 가져온 물건이 뭔지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탁자 위에는 실과 잉크, 바늘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벤은 바늘을 쥐고 라이터로 불을 켜려 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헛바퀴만 돌 뿐이었다. 클라우스는 도와주려 손을 뻗으려다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한참 낑낑거리던 벤은 열세 번째 시도 만에 불을 붙이기에 성공했다. 벤은 라이터로 바늘을 달궜다. 대충 바늘에 잉크를 묻히던 클라우스와 달리 벤은 실에 잉크를 먹였다. 그리고는 검게 변한 실을 바늘에 빙빙 둘러 감았다. 덕분에 손이 잉크로 엉망이 되었지만, 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손 줘봐.”
“……손?”
클라우스의 얼빠진 목소리가 넓은 방을 울렸다. 벤은 빨리 내놓으라는 듯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벤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흐릿해진 문신 위에 바늘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는 피를 뱉어내고 잉크를 빨아들였다. 벤은 한 번 찌르고 피를 닦고 한 번 찌르고 피를 닦기를 반복했다. 잔뜩 찡그린 미간이 클라우스의 손바닥에서 피가 나오기 때문인지 집중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벤은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난 죽은 존재고 너 없으면 벌써 세상에서 사라졌겠지.”
벤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 클라우스는 당황해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근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어리광부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번뜩 벤이 고개를 들었다. 클라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벤의 눈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벤의 눈빛은 클라우스의 깊은 곳 어딘가를 관통해 지나갔다. 클라우스는 문득 벤이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없이 몇 번이고 문신을 반복했던 것처럼 이유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날 것만 같았다. 클라우스는 날 떠날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걸 물어보는 순간, 당장이라도 혼자 버려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웃었다. 클라우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벤도 웃어줬다. 활짝 눈꼬리를 내리면서. 창문 밖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클라우스!
허억. 클라우스는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또 그 꿈이었다. 귓가에 흘러 들어간 눈물에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약을 한 것 같은 몽롱함이 몰려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클라우스는 몽롱함이 심해질 걸 알면서도 텅 빈 방 안을 급하게 둘러보았다. 사라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주인을 잃은 강아지 같기도 했다. 클라우스가 움직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에 엉킨 눈물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벤. 너야?”
“…….”
“그래. 깨워줘서 고맙다.”
“…….”
클라우스는 대답이 없음에도 끊임없이 허공에 목소리를 던졌다.
“나도 알아. 벌써 이번 주 들어 네 번째인 거. 그리고 오늘이 수요일인 것도. 아, 다섯 번째였나? 뭐, 한 번 정도는 봐줘. 예쁜 날 봐서라도.”
클라우스는 왼쪽 눈을 찡그리며 윙크를 날렸다. 눈꼬리에 매달려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 베네리노. 내 눈동자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부담스러운 거야? 그냥 편하게 답해도 되는데.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넌 장난이랑 안 맞는 놈이라고.”
창문 밖으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잠을 자는 대신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기로 마음먹었다. 틱─ 라이터 가스가 다 떨어졌는지 헛바퀴만 돌았다. 클라우스는 괜히 담배 필터만 자근자근 씹어댔다. 손바닥 위의 흐려진 문신을 다시 그릴 때가 되었다. 클라우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늘과 잉크를 챙겼다. 서랍을 닫으려던 순간, 구석에 틀어박힌 하얀 실이 클라우스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클라우스는 잠시 고민하다 실을 집었다. 창가에 걸터앉은 클라우스는 실에 잉크를 먹였다. 흰 실이 서서히 검게 물들었다. 그리곤 바늘에 빙빙 둘러 감았다. 덕분에 손이 잉크로 엉망이 되었지만, 클라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왼손을 활짝 핀 클라우스는 글자 위로 바늘을 가져갔다. 10cm, 5cm…… 이제 찌르기만 하면 끝이었다. 바늘에 찔린 부분에서 피가 나올 것이고 실에 묻은 잉크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자신의 손바닥을 찌르지 못했다. 바늘이 닿는 순간, 무언가 펑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파편에 잠식되어 고개를 들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클라우스는 결국 바늘을 던져버렸다.
어느덧 제법 높은 곳까지 해가 떠올랐다. 창문 사이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수십 개의 바늘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날씨는 따뜻했다. 종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뜨겁고 환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