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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

시침이 하늘 꼭대기 달을 향하는 늦은 시간. 하그리브스 가의 주방에선 진한 커피향이 집안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거실의 좁은 소파에 커다란 담요를 덮고 누워있던 바냐는 잠이 오지 않는 몸을 일으켜 향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역시나 바냐가 예상한 그대로 오른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어린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인이나 할 법한 행동을 아이가 하였지만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게 바냐는 조금 재미있게 느껴져 살짝 미소 지으며 한창 짜증내고 있는 아이를 불렀다. 

“파이브, 늦었는데 뭐하고 있어?”
“바냐? 너야 말로 안자고 무슨 일이야? 악몽이라도 꾼 거야?”

잔뜩 구겨져 있던 얼굴이 놀람과 걱정으로 바뀌는 파이브를 보고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기 전에 바냐는 얼른 대답했다.

“아니 약을 안 먹었더니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 데 커피향이 나길래.”
“… 거기 앉아. 따뜻한 우유라도 줄 테니까.
“고마워.”

바냐는 자신의 말을 듣고 딱딱하게 변해버린 파이브의 표정을 보고 괜히 주방으로 온건 아닐까 후회되기 시작하였다. 바쁜데 와서 신경 쓰이게 만든 걸까? 커피만 가지고 어서 가야하는 걸 방해해버린 걸까?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바냐의 표정이 밤하늘만큼 어두워졌을 때 앞에서 탁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의 파이브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 한 잔을 내려놓으며 바냐에게 다시 물었다.

“바냐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안색이 어두워. 고민이라도 있으면 털어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금방 처리해줄 게.” 
“…응.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파이브…””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바냐는 파이브에게 어느 하나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자신감 넘치고 대단하던 파이브는 종말에서도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 위기의 상황을 이용하여 더욱 놀랍게 성장했으며 신체 나이가 어려지는 문제가 생겨도 실수보단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며 우선순위를 매기며 상황에 집중했다. 
그에 비해 바냐 자신은 가족들과 다르게 능력이 있는 것도,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실수를 하면 한참이나 그 사실에 얽매여 시간을 낭비하느라 또 뒤쳐지기 일쑤여서 너무나 한심했다. 지금도 파이브는 커피로 밤을 새워가며 노력하는데 약이 없다고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고 파이브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었다.
 파이브는 일반인의 평범한 생활은 잘 몰랐다. 하지만 커미션의 현장요원으로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바 핸들러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빌어먹을 놈들이 꼭 한 둘 정도 있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잠이 오지 않는 다는 소심하고 여린 누이가 혹여 버러지같은 놈의 일 때문에 힘든 가 싶어서 물어봤다.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지만 조금씩 안색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파이브는 예상보다 나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물어봤지만 더욱 상태가 나빠지면서도 아니라고 말하는 바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바냐를 저렇게 만든 뭣 모르는 자식은 뒷조사로 잡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반쯤 비워진 컵을 채우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투둑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파이브의 영리한 머리가 놀라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이내 후두둑 하고 떨어지다 못해 양 뺨을 아무렇게 흘러내리는 눈물줄기를 보고 파이브는 터지려는 화산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쳐버렸다.  

“바냐! 어서 말해! 울 정도면서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어? 그게… 나는…”

 마음에 새겨진 자책은 바냐도 모르게 눈물 흘리게 만들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결국 속눈썹을 넘쳐흐르며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면서 바냐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바냐가 파이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지를 쥐고 있던 손과 무릎 근처가 눈물 때문에 축축했다. 무척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울보처럼 울기까지 해버린다는 생각이 들자 바냐는 눈물이 그만 나오기를 바라면서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지만 의지와 다르게 울음은 더 커져만 갔다. 
 파이브는 더 크게 울기 시작하자 아차 싶었다. 정신적으로 지친 사람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데 그녀를 탓하는 투로 버럭 외쳐서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파이브는 조금 정도 같이 울고 싶어 졌다. 
 거지 같은 남매 놈들(물론 바냐를 제외한)이 다가오는 종말에도 같잖은 일들에 정신이 팔려서 제 말을 귓등으로도 쳐 듣질 않아서 복장이 터졌다. 곧 체념하고 혼자라도 해결하고자 변수를 찾아낼 계산을 하다가 커피 한 잔 마시려 했을 뿐인데!
 하지만 그녀가 서럽게 우는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니 위로를 해야 하는데 정신적으로 최연장자라고는 하나 13살 이후 마네킹 돌로레스와 킬러들 사이에서 지낸 파이브의 부족한 소셜 스킬로는 막막한 일이었다. 

커미션의 레전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울고 있는 누이가 그치길 바라며 하염없이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그때 어슬렁 걸으며 주방으로 온 클라우스가 놀란 듯 멈춰 서서 과장된 말투로 파이브에게 말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드디어 파이브가 그 괴팍한 영감 닮은 성깔로 이젠 바냐를 울린거야? 너무해~”
“너는 또 왜 왔어?! 쓸모 없는 소리만 할 거면 얼른 내 눈앞에서 얼른 꺼져!!”
“그렇게 화만 내다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화병으로 아버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걱정이 서린 눈으로 바냐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그녀 옆의 의자를 끌어와 가까이 앉으며 바냐의 어깨에 팔을 둘러 살짝 안고 손으로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다독여주었다. 파이브는 개수작부리지 말고 꺼지라며 한껏 쏘아붙이려던 걸 멈추고 클라우스가 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약과 술에 찌든 한심한 클라우스의 위로가 바냐에게 통했다. 파이브는 다재 다능하고 유능했지만 바냐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대신 화를 내주는 일 말고는 없었다. 정작 소중한 사람이 힘들 때 위로도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리곤 조금 지나서 깨닫게 되었다. 

 아. 네가 느낀 감정이 이런 거였구나. 사라져 버린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내 방의 불을 켜 놓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게 전부였을 때의 감정을 알겠다. 

10분 정도 흐르자 완전히 진정한 바냐가 민망한 듯 얼굴을 푹 숙인 그대로 이제 괜찮다고 위로해줘서 고맙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우스는 그제야 떨어지는 가 싶더니 꾹 하고 한 번 안고 선 상담과 수다는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미소 지으며 얘기하곤 안주거리를 챙겨서 아버지의 바로 돌아갔다. 

 다시 둘만 안은 주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바냐는 무슨 말을 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잠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파이브는 바냐의 갈색 정수리를 뚫어져라 뻔히 쳐다보다가 한창 고민 중인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냐가 옆에선 파이브를 알아차리고 몸을 틀려는 순간에 파이브가 바냐를 꼭 안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파이브의 포옹에 바냐는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파이브! 잠깐…”
“…미안해. 바냐.”
“미안하다고? 일단 얘기를 좀 하자. 우선 좀 떨어져서…”
“싫어. 내가 말하는 걸 먼저 들어줘.”

거절하려던 바냐는 살짝 시무룩하게 보이는 파이브의 얼굴이 눈에 보이자 괜찮다 말 할 수밖에 없었다. 13살의 모습을 하고 그런 표정은 반칙이었다. 

“나는… 언제나 네가 걱정돼. 종말에 갇혀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네가 쓴 책 덕분이야. 그게 없었다면 그 끔찍한 시간들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지도 몰라. 이렇게 서서 너와 이야기하는 건 모두 네가 해낸 거야.”
“…”

 바냐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다. 호기롭게 책을 출판하고 잠시나마 인기를 얻었을 때는 좋았다. 곧 형제들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완전히 가족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사람들의 관심은 금방 식었고 여전히 무능력한 바냐 하그리브스만 남았다. 가정사를 세상의 가십거리로 만들고 상황을 악화시킨, 성취라고 부를 수 없는 일이었다. 
 
 바냐의 침묵에도 파이브는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뭘 좀 하느라 많이 바빠. 그래서 너와 자주 못 만났지. 만나고 싶지 않거나 그런, 젠장할. …방금 그건 너에게 말한 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담 줘서 미안해. 진심으로 미안해.”
“파이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안돼… 네가 언제 부담을 주었길래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힘든데 내가 계속 괜찮은 지 물어봐서 울었잖아.”
“뭐? 아니 네 질문 때문에 운 것도 내가 힘든 상태인 것도 맞는데 결코 너 때문에 운 건 아니야 파이브. 네가 미안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가 못나서 그런 거야…”

 파이브는 바냐처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든 것도 맞고 내가 질문해서 울어 버린 것도 맞지만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바냐는 특별한 능력이 없을 뿐이지 결코 못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에서 결론은 하나였다. 착하고 여린 바냐가 자신을 생각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바냐는 스스로를 깎아내려 말하는 경향이 심하긴 했다. 그래도 본인 때문에 폄하하는 말이 나오게 하다니!! 자신에게 더욱 짜증나서 종말 때의 습관 때문에 혼자 성내려는 걸 간신히 참은 파이브는 말했다. 

“바냐. 날 위해서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어. 넌 못난 사람이 아니야.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넘치는데 그래. 약에 찌든 클라우스, 영웅놀이에 목숨을 건 디에고, 아버지와 엘리슨에 목 메는 루서 우리 일곱 중에 벌써 셋이나 있는 걸.”
“그렇지만 나도 아버지의 약에 의존하고 다른 일에 재능도 없는데 할 줄 아는 바이올린도 어중간하게 하는 걸… 책도 정신과 선생님의 추천이 없었다면 쓸 일도 없었을 거고… 또…”
“바냐. 그렇게 말 하지 마. 나아지고 싶다고 상담을 다닌 건 너의 의지야. 한계를 느끼면서도 계속 하면서 발전을 원하는 것도 너의 의지라고. 내가 한 단계 성장하겠다고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고 시간 여행을 한 것과 같아. 바냐 너는 너의 의지로 성장하고 있어.”
“아니야… 파이브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너는 결국 시간 여행에 성공했지만 나는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야.”
“그래, 그래서 더 대단한 거야. 다른 사람들이라면 금방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았겠지. 하지만 너는 꾸준히 하고 있어. 제발 너를 소중히 생각해줘, 바냐.”
“…노력… 해볼게… 말해줘서 고마워, 파이브.”
“당연한 걸. 나의 바냐.”

 파이브는 마지막 말을 마치고 나니 밀려오는 민망함에 살짝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면서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제야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느낀 바냐가 달아오르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살짝 말하기 전까지 포옹은 이어졌다. 
 바냐의 중얼거림에 파이브는 순순히 움직이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파이브…”
“왜?”
“포옹은 왜 한거야?... 얘기는 그냥 해도 되잖아.”
“포옹하면 진정되는 것 같길래. 아까도 말하면서 또 울 뻔 했잖아.”
“응… 그렇구나.”

 파이브는 클라우스에게 질투가 났다는 사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 다짐했다.  
 

- 2020. 8. 21 ~ 2020. 9. 25 엄브렐러 아카데미 합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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