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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mate

※혹시 음악과 함께 읽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 BGM은

Bach Partita no. 2 in D minor – Gigue 입니다.

  • 유튜브

햇살이 따뜻한 오후였다. 어두운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날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될 정도로 날씨가 좋아서 아이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바냐는 그 틈에 끼는 대신 제 방으로 올라갔다. 바깥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와 고함소리는 아득한 메아리가 되어 계단을 올라가는 바냐의 귀에 닿았다. 바냐는 그 소리를 반주삼아 바이올린을 연습하기로 했다. 바냐는 활을 들고 악보를 하나씩 넘기다가 하나를 골라 보면대에 얹었다. 바흐의 파르티타 2번, D단조. 바냐는 짧게 심호흡하고는 활을 현에 얹었다. 느릿하게 선율을 이끌던 활은 자신감이 붙자 이내 원래 박자에 맞춰 음을 만들어냈다. 바냐는 악보 위의 음표를 따라 차분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라 레파 라 레미 파 미 솔파미레- 부드러운 멜로디가 바깥의 소음을 잡아먹고 방 안을 가득 채웠을 때, 바냐는 비로소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완전한 몰입은 다른 모든 것들의 색을 죽이고, 세상을 정지된 흑백 필름의 일부로 만든다. 그 안에 존재하는 색은 오로지 자신 뿐. 바냐는 눈을 감고 제 안의 음악이 손끝의 선율과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남은 것은 소리와 자신 뿐이었으므로.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음계 사이에 끼어들었다. 바냐는 활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러자 온통 회색조로 덮인 세상에 다시 색이 깃들었다. 천천히 번지는 색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사람이 보였다. 칼같이 접어 신은 남색 양말, 그 위로 빼꼼 드러난 복숭아빛 무릎, 다림질이 잘 된 반바지, 익숙한 무늬의 조끼와 남색 자켓. 시선을 더 위로 올리면 세상이 돌아가는 꼴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의연한 표정이 있었다. 바냐는 싱긋 웃으며 파이브에게 인사했다.

“안녕, 파이브.”

“안녕, 바냐.”

식사 시간에 봤음에도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 무미건조한 인사였다. 바냐는 바이올린을 의자에 기대어 세워두며 파이브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너는 나가서 안 놀아?”

파이브는 에, 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치해서 못 봐주겠더라고. 그리고 뻔하잖아. 디에고는 루서 머리에 사과를 얹고 칼 던지는 놀이를 하자 그럴 거고, 앨리슨은 그런 디에고에게 루머를 쓰겠지.”

바냐는 풋, 하고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파이브는 그런 바냐를 물끄러미 보다가 질문을 돌려줬다.

“너야말로 왜 나가서 안 놀고 이러고 있어?”

“글쎄. 나도 다른 애들이 유치해보여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파이브의 말에 바냐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까와는 달리 조용한 웃음이었다. 반쯤 접힌 헤이즐색 눈동자 속에는 미처 꺼내지 못한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파이브의 짙은 녹색 눈이 바냐의 얼굴을 바쁘게 훑었다. 기분이 상한 걸까? 남몰래 시무룩해하는 건가? 아니면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걸까. 그는 금세 사라진 미소에 얽힌 의미를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표정을 읽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지만, 바냐는 달랐다. 정확히는 ‘달라졌다.’ 지하실에서 돌아온 이후로 바냐는 제 주위에 벽이라도 세워놓은 듯 굴었다. 두꺼운 벽은 안에서 밖을 보는 것도, 밖에서 안을 읽는 것도 힘들게 만들었다. 파이브는 이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결정에 토를 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내 방에는 왜 왔어, 파이브?”

바냐의 말이 파이브의 생각을 뚝 끊었다. 바냐는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도로 정리하는 중이었다. 파이브는 종이 위의 기호들을 물끄러미 보며 삐딱한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아, 맞아. 덜 유치하게 놀 상대가 필요해서. 그거 정리하고 나가자, 바냐.”

“아, 싫은데-”

바냐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칭얼댔다. 파이브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뭘 하자고 할 줄 알고?”

“또 체스 두자고 할 거잖아.”

정곡을 찔린 파이브는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바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파이브를 보고는 그를 지나쳐 복도로 휭, 나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걸음걸음마다 짜증이 엷게 서린 조잘거림이 이어졌다. 파이브는 바냐의 뒤를 따라가며 잠자코 그의 불만을 들었다.

“너랑 하면 항상 네가 이기잖아, 파이브. 결과가 뻔한 게임을 왜 해?”

“내가 봐줄게, 바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혼자 두는 체스보다는 의미가 있겠지.”

파이브는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을 건너뛰어 바냐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냐는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고는 한숨을 폭 쉬었다. 바냐가 말을 멈춘 이때가 기회였다. 파이브는 일부러 고개를 숙인 뒤 바냐를 흘금, 올려다봤다. 그가 바라던 대로 애처로운 강아지 얼굴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덜 위협적인 인상이 만들어지기는 했다.

“제발, 바냐. 손뼉도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잖아. 체스도 똑같아.”

“글쎄, 나는 하기 싫다니까아-”

바냐는 난감한 기색을 표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돌린 시야의 구석에 작은 움직임이 잡혔다. 집에 남아있을 사람이 없을텐데. 바냐는 파이브가 체스를 두어야 할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동안 움직임의 근원을 찾아 눈을 움직였다. 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바냐의 수색을 도왔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아래서 넘어가는 책장. 커다란 소파에 폭 파묻히듯이 앉아서 다른 형제들의 눈을 피한 외톨이, 벤. 바냐는 벤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2대 1로 하게 해준다면 생각해볼게.”

“2대 1?”

파이브가 되묻자 바냐는 말없이 소파 쪽을 가리켰다. 파이브는 그제야 소파에 숨어있던 벤을 발견했다. 벤은 저를 두고 무슨 거래가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파이브는 작게 코웃음 쳤다. 둘이서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길 것도 아닌데, 마치 이렇게 하면 제가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듯이 웃는 바냐가 마냥 귀여웠다. 파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그 정도는 내가 해줄 수 있지. 벤 데려와.”

“좋아! 벤-”

바냐가 벤을 데려오는 동안 파이브는 게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벤이 ‘또 파이브의 속셈에 휘말렸냐’며 바냐를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벤은 책을 덮을 것이고, 책갈피를 미처 끼우기도 전에 바냐에게 이끌려 의자에 앉을 테니까.

“...안녕, 파이브.”

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파이브는 씩 웃으며 흰색 말을 벤의 앞으로 돌려놨다. 벤은 가운데 있는 폰을 앞으로 움직였다. 파이브는 반대편 구석에 있는 폰을 움직였고, 바냐는 파이브가 큰 실수라도 한 것 마냥 킥킥댔다. 너무 똑똑했던 아이와, 너무 소심했던 아이와, 너무 외로웠던 아이. 세 명의 외톨이는 체스판을 가운데 두고 작은 안식을 꾀했다. 이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뭐 해, 베네리노?”

너무 둥둥 떠다니는 아이도 종종 그 대열에 섞여들었다. 클라우스는 벤의 뒤에 슥 다가오며 말을 붙이고, 옆에 있는 바냐에게 찡긋, 윙크했다.

“체스.”

“아, 범생이 게임을 하는구나. 차라리 모노폴리를 하지 그래? 누구 아이디어였어? 고리타분한 게 아마도 파이브였을 거 같은데.”

클라우스의 통찰에 바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파이브는 위를 노려보며 작게 으르릉댔다.

“시끄러워, 클라우스.”

“내 마음대로 말도 못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파이브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헛웃음을 뱉고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클라우스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바냐는 그런 클라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둘이 그러는 동안 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2대 1은 무슨. 벤은 속으로 툴툴대며 룩을 옮겼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바냐는 늘 ‘같이 하자’며 벤을 데려오고서는 어물쩡 게임에서 빠져서 구경꾼이 되었다. 벤은 함께 하자며 저를 초대해주는 바냐가 싫진 않았지만 이럴 때는 도와주지 않는 게 야속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래, 바로 이런 때. 벤이 미처 말을 내려놓기도 전에 파이브는 기다렸다는 듯 검은 비숍을 앞으로 쭉 옮겨 흰 룩을 잡아냈다. 그리고는 벤에게 얼른 다음 수를 두라며 눈짓으로 신호했다. 톡톡톡, 파이브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게임이 진행되는 속도가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따라오지 못하는 듯 했다. 벤은 허공에서 빼앗긴 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표정을 구겼다.

“아무리 그래도 내려놓을 때까지는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냐?”

“빨리 다음 수나 둬, 벤.”

“하지만 파이브-”

“전체에게 알린다!”

레지널드 하그리브스의 방송이 벤의 칭얼거림을 뚝 잘랐다. 벤도, 파이브도, 바냐와 시시덕대던 클라우스도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집중하지 않는 건 바냐 뿐이었다.

“넘버 1부터 넘버 6, 임무를 위해 준비하도록! 은행 강도 사건이고, 위치는 맨해튼 북부다. 10분 내로 준비하도록, 이상!”

“아, 또? 진짜 질린다!”

클라우스의 볼멘소리를 신호삼아 앉아있던 파이브와 벤은 몸을 일으켰다. 넘버 4, 넘버 5, 넘버 6으로 변할 시간이었다. 숫자가 불리지 않은 일곱 번째 하그리브스는 두 사람이 비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녀와, 다들.”

바냐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함께 웃고 떠들다 이렇게 혼자만 뚝 떨어지게 될 때면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무거워졌지만, 그렇다고 다른 형제들에게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제가 특별하지 않은 것은 형제들의 죄가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클라우스는 앉아있는 바냐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아주며 바냐를 도닥였다.

“오, 바니... 금방 다녀올테니까 너무 시무룩해하지는 마.”

“응.”

“다음에 이어서 할 거니까 말 건드리지 마, 바냐.”

파이브는 바냐에게 툭 던지고는 푸른 빛과 함께 사라졌다. 클라우스는 거기에 대고 반칙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넘버 4, 넘버 5가 준비하러 떠난 뒤에도 넘버 6는 남아 있었다. 벤은 바냐와 체스 판을 번갈아 보며 위로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자마자 파이브랑 결판 낼 거니까, 잘 지키고 있어줘. 엄마가 치울지도 모르니까.”

“응.”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 벤.”

그렇게 넘버 6도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바냐는 소파에 몸을 폭 파묻고 앉으며 위층에서 들리는 소란에 집중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소리, 내 도미노 마스크 어디 갔냐고 외치는 소리, 빨리 나오라며 닦달하는 소리. 그 어디에도 제 몫은 없다는 게 내심 서러웠다.

 

어지르는 사람이 없을 때가 청소하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 아이들이 떠난 틈을 타 그레이스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떨이로 주변을 털던 그레이스의 렌즈에 어지럽게 널린 체스 말이 들어왔다.

“이런 말썽쟁이들.”

그레이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체스 판으로 향했다. 놀았으면 그때그때 정리해야지. 그레이스의 못마땅한 손길이 쓰러진 장기 말로 향했다.

“안 돼요!”

소파에 앉아있던 바냐는 황급히 달려들어 엄마의 손을 막아냈다.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무르며 외쳤다.

“세상에, 바냐! 깜짝 놀랐잖니.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말해주겠니?”

“파이브랑 벤이 게임을 하던 중에 불려갔어요. 돌아오면 다시 할 거라고, 이대로 놔두라고 했어요.”

“아하.”

그레이스는 짧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부탁이라면 작은 엉망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미안해. 여기는 치우지 않고 가만히 둘게. 너희가 게임을 다시 할 때 까지 말이야.”

“고마워요, 엄마.”

“대신 다 놀고 너희가 치워야 한다?”

“네.”

바냐는 게임을 지켜냈다는 생각에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업적이 무색하게 체스 말이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임무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게임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파이브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체스 판만은 아무리 먼지가 쌓였어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라진 아들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내린 결정이었다. 바냐와 벤은 종종 체스판 위에 쌓인 먼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켜켜이 쌓인 먼지가 흐른 시간의 양을 가시화했다. 바냐가 체스판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벤이 다가오고, 둘은 서로와 시선을 잠시 교환했다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벤은 책을 펼쳤고 바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에 대처했다. 의도적인 고립. 그것이 파이브의 실종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견디기엔 괜찮은 방법이었다.

체스 클럽의 두 번째 멤버가 저택을 떠났다. 벤의 죽음 뒤, 바냐는 종종 체스 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껍게 쌓인 먼지는 색을 가리지 않고 내려앉아 검고 흰 사각형을 공평한 회색으로 덮어버렸다. 바냐는 정사각형 위에 배치된 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얀 말이 검은 말보다 현저히 적었다. 누가 이기고 있었는지 자명한 게임. 하지만 선수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이 게임의 승패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바냐는 체스 말을 움직이는 상상을 했다. 파이브의 전략을 따라, 벤의 생각을 따라 말을 움직이고 지독하게 오래 끌린 게임을 제가 끝내버리는 상상. 하지만 언제나 망설임이 앞을 막아섰기 때문에 체스 판 위의 두꺼운 먼지는 점점 더 두꺼워지기만 했다. 바냐가 그렇게 앉아있으면 클라우스는 반대편 의자에 앉아서 바냐와 함께 게임 판을 바라보곤 했다. 둘은 말없이 함께 앉아서 엄마가 주변을 청소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레이스는 거실에 있는 모든 것의 먼지를 털었지만-벽에 걸린 박제까지도 청소했지만-체스 판만은 가만히 두었다. 아이들의 부탁이 회로 깊숙이 새겨졌기 때문이었다. 바냐는 차라리 엄마가 그 부탁을 잊었으면 했다. 그레이스가 두꺼운 먼지가 쌓인 체스 판을 못 본 척 지나가면 바냐는 입술을 꾹 깨물고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가고는 했다. 뒤에서 클라우스가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때도 있었고, 아무 소리도 저를 쫓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바냐는 바이올린을 들고 억지로 선율 속에 파묻혔다. 라 레파 라 레미 파 미 솔파미레. 세상이 단조로운 흑백의 모노톤으로 멈춰버리면 시간 역시 멈추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는 다른 이의 빈자리는 아무래도 좋아진다. 형체도 없는 선율로 마음에 생긴 구멍을 채울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바냐는 눈을 감고 활을 움직였다. 체스 클럽은 완전히 끝났다. 외톨이 셋과 한 명의 구경꾼, 네 아이의 유년은 네모난 판때기와 검고 흰 말에 얽힌 채 가만히 굳었다.

 

‘멈춰버린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고인 것은 언젠가 다시 흐르고, 쌓인 먼지는 걷히기 마련이다. 늦은 저녁이었다. 파이브는 벽난로 앞을 서성이다가 체스 판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45년 전의 기억이 눈앞에 겹쳐졌다. 정말 그대로 남겨놨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의자에 앉았다. 훅, 하고 입으로 가볍게 바람을 불자 서로에게 엉겨 붙은 먼지가 덩어리가 되어 공중으로 풀썩 날아올랐다. 파이브는 함박눈처럼 덩어리져 떨어지는 먼지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건지, 흩날리는 먼지는 종말 이후 흩날리던 재보다 더 두꺼워져 있었다. 희끄무레하던 체스 판에 선명한 흑과 백이 돌아왔다. 파이브는 휴지를 한 장 뽑아들고는 말을 하나씩 정성스레 닦았다.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바냐가 파이브를 따라 말을 하나씩 닦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해진 말들은 파이브와 벤이 남겨놓은 자리에 도로 돌아갔다. 파이브는 마지막 말-검은 킹-을 자리에 돌려놓고는 바냐에게 물었다.

“Care for a game? For old time’s sake.”

“I guess.”

‘너랑 하면 네가 이겨서 재미없다’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바냐는 흔쾌히 파이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파이브는 작게 웃으며 흰색 말이 바냐의 앞으로 오도록 판을 돌렸다. 바냐는 책상을 드럼처럼 가볍게 두구둥, 두드리며 물었다.

“누구 차례야?”

“내가 벤의 룩을 잡은 게 마지막이었을 거야. 그러니 백이 움직일 차례지.”

“그렇구나. 살살 부탁해, 파이브.”

바냐는 수줍게 웃으며 하얀 기사를 앞으로 옮겼다. 파이브는 코웃음을 치며 검은 비숍을 움직였다. 판의 한 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눈 깜짝할 새 움직인 비숍은 바냐가 방금 옮긴 기사를 넘어뜨렸다.

“게임에 살살이 어딨어?”

“앗, 너무해!”

바냐는 경기장을 떠나는 작은 말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게임에 살살이 어딨냐던 파이브의 말은 괜히 한 말이 아닌 듯 했다. 다음 수도, 그 다음 수도. 바냐가 말을 옮기는 족족 파이브는 그를 넘어뜨리거나, 틈을 파고들어 왕을 위협했다. 나이트, 룩, 비숍. 공격할 수 있는 말은 경기장을 떠났다. 바냐는 어느새 텅 비어버린 판을 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온통 검은 색이 차지한 판에 남은 말은 폰 한 줌과 퀸, 킹이 전부. 이럴 때 벤이 있어야 하는데. 바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폰을 옮겼다.

“이런, 바냐. 그거 말고 퀸을 움직여서 나이트를 잡았어야지!”

바냐는 모르고 있었지만, 체스 클럽의 마지막 멤버는 바냐의 옆에 와서 경기를 관전하던 중이었다. 선수와 관객이 뒤바뀐 상황, 벤은 바냐가 수를 둘 때마다 탄식하며 전해지지 않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벤이 아무리 소리치고 힌트를 주려고 해도 바냐는 듣지 못했다. 파이브는 바냐가 내려놓은 폰을 기다렸다는 듯 비숍으로 낚아챘다. 벤은 차라리 안 보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에 얼굴을 손으로 덮고 소파에 푹 파묻혀 앉았다. 바냐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벤의 속을 더 긁었다. 지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오, 범생이들. 드디어 게임을 이어서 하는 거야? 몇 년 만이지... 13년인가?”

체스 클럽만의 5번째 비틀즈 멤버가 거실로 살랑살랑 걸어 들어왔다. 클라우스는 나무 판을 사이에 두고 골똘히 생각하는 바냐와 파이브를 흘긋 보고는 미니 바로 직행했다. 저들이 체스를 두든 말든, 그에게는 당장 입에 알코올을 들이붓는 게 중요했으니까. 벤이 저를 보고 화색이 도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올드 패션드 글라스에 얼음을 한 움큼 담고 손에 잡히는 술을 냅다 들이부었다. 마시고 보니 보드카인 것 같았다. 아니면 정말로 맛없는 진이거나.

“클라우스, 잘 왔어!”

벤은 클라우스의 앞에 불쑥 나타나며 그를 붙잡았다. 별안간 시야를 가득 메운 얼굴에 클라우스는 놀라서 입에 든 것을 푸, 뿜었다. 벤은 얼굴에 뿌려지는 술과 타액에 눈을 꾹 감고 분을 삭였다. 클라우스는 벤의 짜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리룰 푹 숙이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알코올 몇 방울이 기도로 들어가서 숨을 내쉴 때마다 따갑고 화한 감각이 목에 퍼졌다. 그는 한참 후에 몸을 일으키면서 벤을 노려봤다.

“벤! 그렇게 놀래키는 게 어딨어?”

“그렇다고 입에 든 걸 뱉을 것 까지는 없잖아.”

“일부러 뱉은 거 아니거든.”

파이브는 허공에 대고 술을 뱉고 툴툴거리는 클라우스를 흘긋 돌아봤다. 시끄러운 소리에 불만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왜인지 잔소리가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클라우스는 클라우스니까. 그는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벤은 경기가 진행되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클라우스를 붙잡았다.

“어쨌든 잘 왔어, 클라우스. 나 좀 도와줘.”

“무슨 일인데?”

“바냐가 체스를 너무 못해. 도와주고 싶은데 내 목소리는 안 들리잖아.”

“아- 영매가 필요하구나?”

클라우스는 잘 알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술을 홀짝였다. 알코올이 들어가 고양된 기분은 그를 한층 자비롭게 만들었다. 벤이 자기를 놀래켜서 아까운 술을 쏟았다는 사실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 파이브를 꺾어놓고 귀여운 바냐를 도와주는 일이라면야. 클라우스는 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거 한번 해주지.

 

“바니, 바니, 바니.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도와줄까?”

클라우스는 체스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민하는 바냐의 옆에 다가서며 말했다. 바냐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고개를 들고는 클라우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는 똑똑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저를 도와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완전히 수세에 몰린 상황. 바냐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클라우스를 대신 앉혔다. 파이브는 둘의 선수 교체 장면을 보고는 픽 웃었다. 클라우스라니. 바냐가 절박하긴 한 모양이었다.

“클라우스를 대신 앉히다니. 진심이야, 바냐?”

“원래 2대 1이었잖아.”

“그래서가 아니라- 됐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야. 클라우스, 너 체스 두는 법을 알기는 해?”

파이브가 저를 무시하는 투로 뱉자 클라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봤다. 지금 제가 등 뒤에 누굴 업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클라우스는 부러 손가락을 뚝 꺾으며 도발하는 투로 파이브의 말을 받아쳤다.

“오, 네 재수 없는 입을 다물게 할 정도는 될 걸.”

“하, 두고 보지.”

파이브는 검은 폰을 앞으로 옮기며 뱉었다. 벤은 기다렸다는 듯 클라우스에게 다음 움직임을 알렸다. 흰색 폰이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검은 룩이 다른 폰을 잡아먹고, 비숍이 퀸의 코앞까지 오는 동안 벤은 폰 하나만 움직였다. 파이브의 검은 말은 체스 판 위를 종횡무진하며 백을 잡아먹었다. 어렸을 때 게임에 집중하지 않은 바냐와 클라우스에게는 이 공격이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항상 파이브를 상대해온 벤에게 이 공격은 뻔한 패턴이었다. 수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파이브는 초반에 판을 깔끔하게 치워두고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말로 상대를 치고 빠지는 방법을 좋아했다. 체스 판 위에서도 공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공격력이 좋은 말들은 모조리 앞에 나가있는 탓에 뒤가 텅 비는 것도 파이브의 특징이었다. 어차피 앞에서 우왕좌왕하느라 뒤까지 못 올 것을 알기에 취한 전술이었다. 자신만만하기도, 오만하기도 한 과감한 선택. 벤이 노린 것은 바로 그 허점이었다. 벤의 속을 알 리 없는 클라우스는 벤의 지시를 의심하며 미심쩍은 손길로 폰을 옮겼다. 파이브의 퀸이 백색 퀸을 쓰러뜨리는 동안에도 벤은 폰을 가리켰다.

“클라우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체스 판 위에 남은 흰색 말이 손에 꼽을 정도로 줄자, 바냐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클라우스에게 물었다. 클라우스는 벤을 살짝 노려봤다가 바냐에게 씩 웃으며 억지로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으응... 나만 믿어, 바냐.”

“믿긴 무슨.”

파이브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옮겼다. 클라우스는 ‘슬슬 한 방을 날리는 게 좋을 거야’라고 입모양으로 벤에게 말했다. 벤은 ‘날 믿어’라고 맞받아치고는 폰을 판의 끝으로 옮겼다.

‘체스 판의 끝에 다다른 폰은 어떤 것으로든 변할 수 있지.’

벤은 파이브의 뒤를 칠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파이브의 자만과 방심이 낳은 결과였다. 능력만 믿고 까불더니, 하!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의 승리다. 벤은 백색 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클라우스에게 지시했다.

“클라우스, 이걸 퀸으로 바꿔.”

“...이걸 퀸으로! 퀸으로 바꾸겠어!”

“...이런.”

파이브의 얼굴이 굳자 클라우스는 의기양양해져서는 말을 교체했고, 바냐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제 쪽이 이길 것 같자 웃음을 터트렸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파이브는 퀸을 막으려 돌아왔지만, 뒤쪽이 텅 빈 탓에 하얀 여왕은 눈 깜짝할 새 검은 왕을 넘어뜨렸다. 클라우스는 제가 세운 전략이 아님에도 마치 제가 이뤄낸 승리인 양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검은 왕을 툭, 넘어뜨렸다.

“Check, mate.”

“허.”

“와!”

파이브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뱉자 바냐가 뒤이어 작게 환호했다. 아주 파티라도 열 것처럼 얼싸안고 기뻐하는 바냐와 클라우스의 모습에 벤은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파이브를 꺾었다는 사실도 기쁨에 일조했다. 파이브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판을 뚫어져라 보다가 클라우스를 향해 비아냥댔다.

“말도 안 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똑똑했지?”

바냐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던 클라우스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 파이브의 머리를 가볍게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오, 파이브- 너는 항상 나를 과소평가했지. 인정해. 이건 온전히 나의 승리라고.”

그 말을 들은 벤은 웃다 말고 눈썹을 올리며 클라우스를 쳐다봤다. ‘온전히 너의 승리’라고? 클라우스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벤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패배의 쓴맛을 본 파이브와 얼렁뚱땅 이겨버린 바냐, 제 것도 아닌 승리에 취한 클라우스와 눈 뜨고 공을 뺏겨버린 벤까지. 파이브가 다시 하자며 둘을 붙잡는 것을 시작으로 덜 자란 아이들의 체스클럽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 2020. 8. 21 ~ 2020. 9. 25 엄브렐러 아카데미 합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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