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은 무언가를 감추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어두운 장막은 형체를 가리고 이목구비를 뭉개며 그들이 한 일을 숨겼다. 그 장막 아래에 숨죽이고 있을 때면, 진정한 자유를 가진 것처럼 마음이 탁 놓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해가 뜨면 어둠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흩어지고, 무엇이든 가려줄 것만 같던 칠흑 같은 커튼도 산산이 조각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파이브는 밤이 좋았다. 낮에는 그를 보고 있는 시선이 너무 많았고, 파이브가 받는 시선에 못지않게 바냐를 보고 있는 눈동자도 너무 많았다.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성격이 좋은 편에 속하지 않는 그는, 자신을 관찰하듯 보는 시선에는 코웃음을 치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바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은 견딜 수 없었다. 상대를 관찰하는, 혹은 평가하는 듯한 눈초리에 바냐가 움츠러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상대의 눈을 잔인하게 후벼파고는 감히 바냐를 저열하게 바라본 그 눈동자를 끄집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냐가 알면 충격 받을 테니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깊은 밤이 되면, 파이브는 종종 바냐의 방에 들어갔다. 순간이동 능력의 가장 큰 장점은 소리 없는 빠른 이동이었고 그는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는 사람이었다. 파이브는 바냐가 놀라지 않았으면 한다는 대외적인 이유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바냐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내적인 이유를 가지고 항상 바냐의 방에 방문하는 날 미리 말을 해두었다. 그러면 바냐는 잘 준비를 마친 후에 방에서 그를 기다리곤 했다. 가끔은 간식거리를 챙겨두는 날도 있었으며, 풀지 못한 십자말풀이를 가지고 파이브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면 파이브는 허공에서 등장해서는 '안녕, 바냐.'하고 항상 하는 인사말을 했다. 두 사람은 성격적인 면에서도 능력적인 면에서도 극과 극을 달리는 사람이었지만 합은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파이브가 바냐의 방에 들어왔을 때 방이 텅 비어 있다는 가정은 해본 적이 없다는 소리다.
"바냐?“
당황한 파이브의 목소리가 바냐의 작은 방을 채웠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와 책상 정도가 놓여 있는 방에는 바냐처럼 작은 덩치의 사람도 숨을 공간은 없었다. 파이브는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에야 당혹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납작한 침대의 이불도 들춰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옆 방의 클라우스가 깰까 봐 작은 목소리로 바냐의 이름을 부르며 방을 한 바퀴 돌았음에도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야?“
책상 위의 초콜릿 한 무더기를 보니 파이브를 기다린 것은 분명했다. 본래 하그브리스의 7남매는 철저하게 취침 시간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파이브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냐는? 파이브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바냐는 규칙을 잘 지키는 나머지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대외적인 활동에도 끼지 못했다. 한 번쯤은 형제들 사이도 뛰쳐 들어와도 될 텐데. 그럼 내가 '바냐, 내 형제.'하고 받아줄 수 있을 텐데. 아무리 그렇게 상상해도 바냐는 그러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니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방 밖을 나가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길 리가 없었다.
그는 흠, 하고 고민하더니 초콜릿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서 입안에 넣었다. 바냐 방이니까, 하고 껍질을 구겨 주머니에 넣고는 방문을 당겼다. 기껏해야 화장실을 갔거나 했겠지. 문 앞에는 바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비명 내지는 욕설이 나올 뻔한 파이브는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반쯤 녹은 초콜릿이 입을 막은 손바닥에 묻으며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을 자아냈다. 칠흑처럼 어두운 복도에 한 줄기 빛이 들었음에도 바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작게 욕설을 하며 손바닥에 묻은 초콜릿 흔적을 혀로 핥아 없앤 파이브가 문을 활짝 열고, 바냐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속삭였다.
"바냐, 여기서 뭐해? 놀랐잖아.“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질 것은 소곤거림에 바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이브는 제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싶어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그러나 다른 형제들이 깰 만큼은 아닌 크기로 다시 물었다.
"…….“
여전히 바냐는 침묵했다. 돌연 몸을 틀어서는 파이브가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든 말든 뚜벅뚜벅 걸었다. 파이브는 문간을 잡고 상체만 내민 상태로 작게 바냐의 이름만 불렀다. 악문 잇새로 이름이 짓 씹혀 흘러나왔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 파이브는 천천히 어둠 속에 파묻히는 바냐의 인영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튀어 나가 바냐의 팔을 잡아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 들어도 된다.
파이브에게 팔이 잡혀 몸이 돌려진 바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놀라는 표정도, 침울해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평온한 얼굴이었다. 갑작스레 몸이 돌려지자 바냐는 허공에서 걸을 것처럼 왼발을 디뎠다가 무게중심이 흔들리며 와르르 무너졌다. 다급하게 다른 팔을 내밀어 바닥에 완전히 부딪히기 전에 바냐를 잡아낸 파이브는 고개를 푹 숙인 그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얌전히 있었다.
"바냐, 뭐 하는…….“
고른 숨소리. 몸에 힘을 준 것 같지 않은 축 늘어짐. 무표정한 것이 아니라, 잠든 얼굴. 파이브는 문득 깨달았다. 바냐는 자고 있었다. 파이브가 처음 마주했을 그때부터. 그는 약간 아연한 기분으로, 혹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받으며 제 품에 안긴 바냐를 내려다보았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나왔지만,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복도에서 제 몸에 가려진 바냐의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이브는 조심스럽게 바냐를 끌어안은 자세를 고치고는 방과의 거리를 쟀다.
순간이동은 간편하긴 하다. 눈 깜짝할 사이의 바냐의 방에 들어온 파이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볼까 봐 서둘러 문을 닫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바냐를 보니 파이브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옷을 입고 있는 바냐는 어쩌다 오늘 자신을 기다리다 자게 된 걸까. 어쩌다 몽유병에 걸린 걸까. 파이브는 바냐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베개 위로 쓸어올려주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몽유병에 걸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파이브는 바냐의 방을 방문한 날짜를 세보다가 순순히 인정했다. 바냐를 자주 방문하기는 했지. 몇 번 졸고 있는 바냐를 발견한 적은 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다. 기껏해야 며칠, 잘해야 일주일일 테다. 오래된 저택은 작은 움직임에도 끔찍한 비명을 내기 일쑤였지만, 반대로 요란한 충격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게다가 바냐는 형제 중에 제일 덩치가 작고 몸무게가 덜 나갔다. 그러니 밤에 저택을 돌아다녀도 들키지 않았겠지.
이불을 덮어주니 처음부터 침대에서 잠이 들었던 것처럼 바냐는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파이브는 저도 모르게 바냐의 이마 위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와 그레이스에게는. 몽유병은 스트레스로 생기는 병이다. 평소에 바냐가 집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생각해보면 어쩌다 생겼는지는 뻔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바냐를 꾸중할 것이고 몽유병이 더 심해질 게 분명했다. 그레이스라고 다를 게 없었다. 결국은 아버지가 만든 로봇이다.
파이브는 점점 제 손길이 점점 이마를 타고 내려가 뺨을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결을 만지작거리며 어떤 생각에 골몰히 빠져있는, 혹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냐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바냐는 자신에게 스트레스틑 받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다. 뺨을 타고 내려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파이브는 곤히 자는 바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 시간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파이브 그 자신뿐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바냐조차도 일어나면 깊은 밤중에 일어난 일들을 까맣게 모른다. 바냐의 일부분을 파이브 혼자서만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어째서인지 그는 기이한 만족감이 들었다. 한참을 침대 가에 앉아 바냐의 얼굴을 보던 파이브는 새벽이 밝아오자 제 방으로 사라졌다.

